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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정보산업협회] 인공지능과 ‘일’의 이데올로기

2020.07.01.

지능정보산업협회 정기간행물의 AI이슈 섹션에 법무법인 디라이트 조원희 변호사가 <인공지능과 ‘일’의 이데올로기>의 주제로 기고한 칼럼이 보도되었습니다.

AI 이슈 인공지능과 '일'의 이데올로기 조원희 법무법인 디라이트 대표변호사 3년 전쯤 대형 로펌을 나와 작은 사무실을 시작하며 5년 뒤, 10년 뒤 법률 서비스는 어떻게 바뀔까를 고민했다. 무한경쟁 속에 뛰어든 기분이 들어서인지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다급함이 있었고, 미리 시장을 선점해야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법률 서비스의 변화는 사람도 시장도 아닌, 기술에 의해 촉발될 것이었고, 그 중심에 인공지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공지능에 기반한 법률 서비스를 준비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술 자체를 이해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개발 인력을 구하는 것이나 실현 가능한 기술 수준에 맞추어 개발 방향을 정하는 것은 훨씬 어려웠다. 기계학습이 가능한 정도의 데이터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판례가 충분히 공개되어 있지도 않았고(판결 공개는 여전히 진전이 없다), 다양한 정부, 공공기관의 유권해석이나 사례들도 데이터 포맷이 달라 수집이 용이하지 않았다. 결국 인공지능은 포기하고 블록체인 기반의 전자계약 서비스로 개발 방향을 바꾸었고, 코메이크(Comake)라는 스타트업을 설립하여 작년 9월 정식 서비스를 개시했다. 전자계약의 '체결'에 방점을 두고 서비스를 시작했으나, 자동 작성이나 계약서 검토에 대한 수요는 계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변호사가 개입하는 방식으로는 실용적이지 않았다. 인공지능 기술의 사용을 다시 고려해야 했다. 코메이크의 개발 인력이 보강되자 마자 개발을 시작했다. 인공지능 기술이 오픈 소스 기반이라고는 하나 한국어 학습이 되지 않은 인공지능 엔진을 바로 사용할 수 없었고, 제한된 개발비와 인력으로 스스로 한국어 학습을 시킨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국내 연구기관이 한국어 학습을 한 엔진(korBERT)을 공개하여 그걸 기반으로 개발을 할 수 있었다. 일단 학습 데이터 확보가 쉬운 회사 정관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공개된 정관을 1만 건 이상 확보할 수 있었고, 모델링과 다양한 수작업을 거쳐 이제 시연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7월 시연을 앞두고 전혀 의외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인공지능이 변호사를 대체하게 될까? Artificial Intelligence Industry Association
잠시 다른 얘기를 해 보자. 필자는 쏘카(Socar) 구독 회원이다. 지방 갈 일이 있으면 가급적 차를 몰고 가지 않고 열차나 버스를 이용해서 내려간 뒤 지방에서는 쏘카를 사용한다. 쏘카 스테이션이 점점 많아져 웬만한 규모의 도시면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다. 가격도 저렴하다. 1달 전쯤 주말에 양양을 다녀온 적이 있다. 예전에는 양양에 버스로 도착하면 택시를 타고 숙소를 갔는데, 이제는 쏘카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날은 긴 줄로 대기 중인 택시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었다. 언제 올지 모를 손님을 기다리며 삼삼오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저 택시를 탔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비용이나 편의성을 생각하면 다시 택시로 돌아가지는 않을 듯하다. 주관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최근 몇 년 기술에 의한 사회 변화를 더 크게 느낀다. 코로나 사태는 변화를 더욱 가속화 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변화가 '일'의 변화다. 어떤 일들은 없어지고, 새로운 일들이 생겨난다. | '일(노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과 이데올로기가 있다. 일을 인간의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인간이 일로부터 자유로운 때가 있었을까? 그만큼 일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보편적이다. 그러나 일은 시대를 거쳐 가며 그 내용이 달랐고 일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하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수공생산에서 기계생산으로 변화되면서 일은 달라졌고, 일의 변화는 삶의 변화,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다. 일은 사회, 경제 체제를 이해하는 주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와 문명의 진보에서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일이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고 이해했다. 그런데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그리고 효율성 추구가 주된 목적이 되기 시작하면서, 일의 성격은 변화되었다. 일이 분화되면서, 소외의 문제를 보기 시작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집적의 수단이 되는 노동의 분화로 인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소외는 필연적으로 발생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일은 수단이어서는 아니 되고 자기실현의 방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일에서의 존엄성 추구는 카를 마르크스의 주요한 이론적 기둥이다. 그런데 정보사회에 이르면서 일에 대한 이해는 더욱 복잡해진다. 자본주의는 문명화되었고 한편으로 더욱 고도화되었다. 더 이상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만으로 해석되어지지 않는다. 기계,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인간성의 실현일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외를 넘어선 배제가 되었다. 광적일 정도의 여가 추구는 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일자리 부족에 대한 사회적 비판은 역으로 일을 계속 만들어내야 하는 아이러니를 가져온다. 이쯤 되면 일의 문제는 전통적인 사회, 경제 이론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워진다. 일은 목적인가, 수단인가? 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원하는 여가를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인가? 일이 소득의 원천이 되지 않고 경제적 자유만 제공된다면, 일은 없어도 되는 것일까? 인공지능으로 인한 일의 변화는 분명해 보인다. 세계경제포럼도 인공지능이 노동시장에 격변을 가져오고 일자리를 감소시킬 것이라고 발표하였고, 가트너 역시 현재와 같은 발전 속도라면 10년 안에 인공지능으로 인해 일자리의 1/3이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산업화 이후의 역사를 보면, 기술로 인한 일자리 감소에 대한 과민한 대응은 새로운 일자리의 출현으로 일시적인 해프닝 정도로 끝났다. 일자리의 증가와 노동시간의 감소는 산업 규모에 맞는 노동시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경우도 그럴까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없다. 대안으로 논의되는 로봇세, 디지털세 등을 통한 기본소득이 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인공지능은 일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만든다. 일은 여전히 자아성취를 위한 방편일 수 있고 소명일 수 있다. 또한 일은 하기 싫은 고역일 수도 있고,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원인일 수도 있다. 고도화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경제 시스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의 문제는 어떻게 해석되고, 해결되어야 할까? 특정 이데올로기만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인류의 시초로부터 관통해온 일의 보편성이라는 명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총체적 인간에 대한 유익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인공지능은 변호사를 대체하게 될까? 이 질문은 앞서 제시한 기준에서 한참 벗어난다.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인공지능을 활용한 법률 서비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가? 이러한 서비스는 변호사를 일의 보편성으로부터 배제 시키는가? 인공지능이 가져올 사회 변화의 문제는 단순히 일자리 수의 문제로 접근할 것은 아니다. 일은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인간은 여유를 즐기자는 안이한 생각도 도움 되지 않는다. 따분할 수 있는 철학적, 윤리적 논의가 우리 사회에 시급히 필요하다. 근본적인 변화를 노정하는 이슈라면 우리의 고민도 인간과 삶의 본질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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