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다른 얘기를 해 보자. 필자는 쏘카(Socar) 구독 회원이다. 지방 갈 일이 있으면 가급적 차를 몰고 가지 않고 열차나 버스를 이용해서 내려간 뒤 지방에서는 쏘카를 사용한다. 쏘카 스테이션이 점점 많아져 웬만한 규모의 도시면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다. 가격도 저렴하다. 1달 전쯤 주말에 양양을 다녀온 적이 있다. 예전에는 양양에 버스로 도착하면 택시를 타고 숙소를 갔는데, 이제는 쏘카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날은 긴 줄로 대기 중인 택시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었다. 언제 올지 모를 손님을 기다리며 삼삼오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저 택시를 탔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비용이나 편의성을 생각하면 다시 택시로 돌아가지는 않을 듯하다. 주관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최근 몇 년 기술에 의한 사회 변화를 더 크게 느낀다. 코로나 사태는 변화를 더욱 가속화 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변화가 '일'의 변화다. 어떤 일들은 없어지고, 새로운 일들이 생겨난다. | '일(노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과 이데올로기가 있다. 일을 인간의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인간이 일로부터 자유로운 때가 있었을까? 그만큼 일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보편적이다. 그러나 일은 시대를 거쳐 가며 그 내용이 달랐고 일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하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수공생산에서 기계생산으로 변화되면서 일은 달라졌고, 일의 변화는 삶의 변화,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다. 일은 사회, 경제 체제를 이해하는 주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와 문명의 진보에서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일이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고 이해했다. 그런데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그리고 효율성 추구가 주된 목적이 되기 시작하면서, 일의 성격은 변화되었다. 일이 분화되면서, 소외의 문제를 보기 시작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집적의 수단이 되는 노동의 분화로 인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소외는 필연적으로 발생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일은 수단이어서는 아니 되고 자기실현의 방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일에서의 존엄성 추구는 카를 마르크스의 주요한 이론적 기둥이다. 그런데 정보사회에 이르면서 일에 대한 이해는 더욱 복잡해진다. 자본주의는 문명화되었고 한편으로 더욱 고도화되었다. 더 이상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만으로 해석되어지지 않는다. 기계,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인간성의 실현일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외를 넘어선 배제가 되었다. 광적일 정도의 여가 추구는 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일자리 부족에 대한 사회적 비판은 역으로 일을 계속 만들어내야 하는 아이러니를 가져온다. 이쯤 되면 일의 문제는 전통적인 사회, 경제 이론으로는